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하일 고르바초프 (문단 편집) === 퇴임 후 === [[파일:external/static01.nyt.com/05vuitton.600.jpg]] 2007년 루이 비통 광고에 출연한 고르바초프 (76세) 이후 1996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도 나갔으나 [[보리스 옐친]]이 당선되었고 고르바초프의 지지율은 0.5%를 기록했다. 2011년 선거를 겨냥하여 2008년 9월에 레베데프와 함께 중도 성향의 러시아 민주당 창당을 발표하면서 12년 만에 정계에 복귀했는데, 그가 맡은 건 당 명예고문 역이라 실질적인 힘은 그리 크지 않았다. 퇴임 후 [[보리스 옐친]]에게 푸대접을 받았다. 거기에 당시 러시아 경제와 사회복지제도가 붕괴되었고 연금도 제때 지급되지 못할 정도로 대우가 형편 없었다. 나름대로 전직 대통령이라는 고르바초프도 연금 지급을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일반 연금 생활자들은 말도 할 것도 없어서 몇 달씩 연금이 밀리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고 한다. 고르바초프는 외국 대학이나 기관의 강연료도 수입이었는데[* 미국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이러한 강연료로 떼돈을 벌었다.] 고르바초프는 [[루이 비통]], [[피자헛]] 등 외국 기업의 CF에 출연하여 생활비를 벌 정도였다. 어느 날, 자신의 매달 연금이 얼마일지 궁금해져 은행서 1달치 연금을 $로 환전했더니 불과 몇십 센트에 불과했다고 기자들 앞에서 한탄하기도 했다. 1993년 4월 1일에 드미트리 무라토프 등 진보성향 언론인들에게 자금 후원을 해 [[노바야 가제타]]를 창간했으며, 지금도 10%의 지분을 갖고 있다. 이 언론사에 들어간 기자들은 정말 육체적 목숨을 걸고 일하고, 언론사에서 기자들에게 개인무장용 권총까지 지급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다. 항목에서 알다시피, 푸틴은 개인이 자신을 욕하는 건 쿨하게 관심도 없다는 듯 넘기지만, 기자와 언론사 레벨로 올라가면 해당 언론사는 탄압당하고, 기자들은 의문사를 당하거나 실종당하는 경우가 많다. 1996년 러시아 연방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0.5%의 처참한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미 1990년대 초반부터 고르바초프에 대한 평가는 최악이었고, 소련 부활을 내세운 [[겐나디 주가노프]]가 1차 투표에서 옐친과 비슷한 득표율(옐친 35%, 주가노프 32%)을 받은 것을 보면, 고르바초프의 당대 평판을 알 수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과 사이가 좋지 않은 편이다. 가끔씩 푸틴을 치켜세우고, 푸틴도 나름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라고 훈장도 달아주고 고르바초프의 말에 상당히 많이 대꾸하는 거 보면 서로 애증의 관계다. 반(反) 푸틴 진영을 지지하며 푸틴과 대립각을 여러 번 세웠다. 고르바초프는 푸틴이 [[독재자]]가 되고 있다고 비판한다.[[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4&gid=692986&cid=313291&iid=351317&oid=022&aid=0002345496&ptype=01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179854|#]] 당연히 러시아의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와의 사이도 좋지 않다. 통합 러시아 소속 [[국가두마]] 의원들이 소련 붕괴의 책임을 물어 고르바초프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38&aid=0002490113|고발]]한 적도 있다. 다만 [[우크라이나 사태]]가 벌어진 [[2014년]]부터는 갑자기 [[http://www.hankookilbo.com/v/8a469fab3bac4989bd0dabbc63de300b|푸틴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는 러시아인이라면 당연한 것인데, 크림 반도는 소련 시절 행정편의로 우크라이나에 간 것인데 이제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상, 다시 러시아에 와야 한다는 것이 러시아인들의 공통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를 추진한 푸틴은 러시아인들의 전적인 지지를 받았다. 사실 푸대접을 받았던 옐친 시대와는 달리 푸틴 집권 이후에는 대우가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2008년 10월 국제환경포럼, 2009년 5월 세계평화의 종 공원 준공 기자회견에 참석했다. 두 행사 모두 서울 중구 프라자호텔에서 열렸다. 2009년 5월에는 손녀 아나스타샤 비르간스카야와 함께 참석했다. 2011년 3월에는 러시아 최고 등급 훈장인 [[사도 성 안드레이훈장]]을 수여받았다. 누가봐도 그냥 요식행위로 준 게 뻔하다. 2011년 8월에는 푸틴 정권이 소련 공산당의 다운그레이드판이며 구태적이라고 비판했지만, 푸틴을 옐친 시대의 혼돈으로부터 러시아를 구했다며 치켜세우기도 했다.[[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62552#0DKU|#]] 12월에는 [[2011년 러시아 총선 사태|148%]]에 대해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재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057&aid=0000182696|#]] 또한 푸틴은 대통령 2번, 총리 1번 했으면 충분하다며 물러나야 한다고 말했다.[[https://imnews.imbc.com/replay/2011/nwdesk/article/2990653_30473.html|#]] 2012년 대선을 앞두고 푸틴 총리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러시아의 정치 불안이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https://www.voakorea.com/archive/article-0209-russia-politics-139034609|#]] 2016년 5월 23일에 크림 합병은 올바른 결정이라는 발언에 문제를 제기하고 입국을 금지한 우크라이나를 비난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8424380|#]] 앞서 서술되었듯이 [[사회민주주의]]를 지지했던 만큼, 현재는 주로 사민주의 계열 군소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가 당수직을 역임했던 러시아 사회민주당은 후에 [[정의 러시아당]]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는 이에 합류하는 대신 사회민주연대라는 신당을 창당했다. 2016년 4월에 방한해 제주포럼에 참석했다. 2016년 6월에는 언론에 많은 러시아 국민들이 자신을 미국 스파이로 평가하는데 억울하다고 하였다가 러시아 국민들에게 냉소만 받았다.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6/02/0200000000AKR20160602048500009.HTML|기사]] 2016년 10월 10일. AFP와의 인터뷰에서 심해져 가는 러시아와 미국간의 갈등을 "세계가 위험한 수준에 도달했다"며 "갈등을 멈추고 대화와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촉구했다. 2017년 1월 27일 핵전쟁 위험이 점점 현실화되면서 미-러가 대화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4&oid=001&aid=0008992788|#]] 2017년 6월, 나토의 확대를 두고 푸틴과 설전을 벌였다. 푸틴은 고르바초프가 순진하게 나토 확장 금지를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토가 확장되어 러시아의 안보가 위험해졌다고 주장했고, 고르바초프는 옐친-푸틴 시절에 확장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http://v.media.daum.net/v/20170614012728644|#]] [[파일:external/img3.daumcdn.net/20170614012727973hhdk.jpg]] 2017년 86세의 고르바초프. [[파일:0002329738_001_20171011155020109.jpg]] 2017년 10월, 자신의 서기장, 대통령 시절 사건과 기억을 담아《나는 여전히 낙관론자》라는 제목의 새 책을 발표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1&aid=0002329738|#]] 책 출간행사에서 한 시민이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생각을 물었고,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가 불러온 긍정적 사실·부정적 사실 모두 있다. 하지만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와 러시아 국민에게 자극을 주었고 그것은 전 세계에 ‘시동을 거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는 후문. 중국의 경제 모델을 호평한 적도 있다. 2019년에도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https://n.news.naver.com/article/001/0011204564|#]] 2020년에는 <[[태양 아래]]>, <푸틴의 증인들>로 유명한 반(反) 푸틴 영화감독인 비탈리 만스키 감독이 촬영하는 다큐멘터리를 찍기도 했다. 이건 2021년에 <고르바초프. 헤븐(Gorbachev. Heaven)>이라는 제목으로 독일에서 상영됐다. 물론 러시아에서는 만스키의 작품 자체가 배급금지를 먹었다. 9월에는 대통령 3번, 총리 1번이면 충분하다며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제 물러나야 하고, 헌법에 기초하여 민주적인 선거로 새 대통령을 뽑아야 한다고 하는 등 또다시 푸틴의 심기를 거스르기도 했다.[[https://www.youtube.com/watch?v=T3997L1e5EU|#]] 하지만 흘러간 정치인인데다가, 고르바초프 본인의 영향력도 거의 없는지라 딱히 푸틴이 탄압을 가하지는 않았다. 2021년에는 2016년에 이어 또 제주포럼에 온라인 화상회의 형식으로 참석했다.[[https://www.newspim.com/index.php/news/view/20210630000165|#]] 2021년 8월 17일, RIA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탈레반의 승리]]로 끝나고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으로 탈출하는 미군과 아프간인의 참상에 대해, 처음부터 성공할 수가 없는 작전이었다며, 패배를 좀 더 일찍 받아들여야 했다고 평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4&oid=025&aid=0003127383|#]] 다음 날인 8월 18일, [[소련 보수파 쿠데타]] 30주년을 앞두고 도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푸틴 정권의 독재적 성향이 심화되고 있다고 또다시 푸틴을 건드렸으며, 그럼에도 본인은 낙관주의자이기 때문에 어려움, 오류, 좌절이 있더라도 러시아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이란 말을 덧붙였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D&mid=sec&sid1=104&oid=021&aid=0002482266|#]] 2022년 1월 13일에 소련의 리투아니아 독립 운동 탄압으로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군사 작전을 중단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서 소송을 제기했다.[[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2D&mid=shm&sid1=104&sid2=233&oid=421&aid=0005844144|#]]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전에 위기가 고조되자 고르바초프는 자신과 부시가 한 약속을 깬 [[NATO]]와 [[미국]]을 비난했다.[[https://www.cbsnews.com/news/gorbachev-says-u-s-became-arrogant-after-soviet-union-collapsed/|#]]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본인은 공개 발언을 하지 않았지만 고르바초프 재단은 "인간의 생명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며 "첨예한 모순과 문제를 해결하려면 상호 존중과 이익에 입각한 협상과 대화가 유일한 방법"이라며 전쟁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놓았다.[[https://news.mt.co.kr/mtview.php?no=2022052904574557653|#]] 서방언론들은 러시아의 반푸틴 성향 언론인인 알렉세이 베네딕토프를 인용하여, 고르바초프는 베네딕토프한테 푸틴은 그가 일생을 바쳐 이룩하려 했던 것들을 전부 잿더미로 만들었다며 탄식했다고 한다.[[https://www.newsweek.com/gorbachev-russia-putin-ukraine-war-destroyed-1727037?amp=1|#]]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